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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 WIND BLOWS.jpg

오늘은 어쩌면

평범

@Commonness_HADA

오지은 - Wind Blows

뜨겁게 데워진 커피잔을 내려놓고 카페의 문 쪽을 바라보았다. 커피를 마시러 방문하기에는 출근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났고 점심시간은 아직 먼, 애매한 시간이어서 그런지 도통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가 없다.

그래서 나는 좀처럼 앉기 힘든 이 카페의 가장 볕이 잘 드는 테이블을 늘 차지할 수 있었고, 이 통창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하루 중 몇 없는 즐거운 시간이다.

 

‘여기서 보는 풍경이 진짜 멋지단 말이지. 그렇지 않냐, 호열아?’

 

아마 네가 함께 왔다면 그렇게 말하며 오늘 운이 좋다며 웃었을 거야.

……그래, 그러니까 어쩌면.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는 오늘 같은 날. 차가운 겨울바람이 산 너머로 흩어지고 비어 있던 가지들 사이 연둣빛 새싹이 돋아나는 이런 따스한 날에.

우리가 끝을 말했던 이 카페에서, 마주치는 상상을 한다.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처럼, 어떤 날에는 여린 바람에도 흔들리는 보드라운 장미꽃잎처럼, 그토록 아름다운 붉은색을 내가 어찌 못 알아볼 수 있을까.

나를 발견한 너는 다시 환하게 웃어줄까, 아니면…….

찌푸리며 나를 노려보는 백호를 떠올렸다가, 상상을 끊어내듯 눈을 감는다.

우연에 기댄 기대는 부질없는 것. 그저 나의 망상일 뿐이다.

유리 너머 쏟아지는 햇살이 따스하다. 얼마 전 춘분(春分)이 지났다더니 이제 정말 봄의 기운이 느껴진다.

 

백호와 헤어지고 홀로 맞이하는 두 번째 봄.

뜨거운 커피를 다시 마시며 통 창 너머의 풍경을 바라본다.

청승맞게 헤어진 커피숍에서 커피를 혼자 마시는 남자라니. 이 얼마나 미련한 짓일까. 헤어진 전 남자 친구를 혹시나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이런 음습한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

​​

​​

***

​​

​​

​​

우리의 시작은 참으로 갑작스러웠다.

 

“호열아.”

 

그때의 나는 백호를 향한 오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해 그저 끌어안고 썩히는 중이었으며, 백호는 몇 번의 사랑을 떠나보내고 지친 상태였다.

이별 후의 백호는 유독 몰려드는 외로움과 허전함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사탕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하며 방황하다 결국엔 나에게 와 슬픔을 토해냈다. 백호의 이별 이유는 매번 달랐고 매우 사소했다. 겨우 이런 걸로 헤어지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런 사소한 이유로 헤어지는 얄팍한 인연이라면 크게 마음 두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만약 나라면 그런 사소한 것에 너에게 이별을 말하지는 않을 거야. 언제나 너만 바라보며 너를 사랑할 수 있을 텐데. 마지막 생각은 친구 사이에 할 말은 절대 아니므로, 그저 나는 늘 다음에는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야 따위의 위로를 해주었다.

몇 번의 사랑에 지친 강백호는 나를 잡고 말했다.

 

“우리 그냥 사귈까?”

 

좋아한다는 말도 없이, 바다를 향해 던진 몽돌처럼 그렇게 나의 가슴을 뚫은 사랑 없는 고백이었다.

고동빛 눈동자는 피로함에 흐렸고, 그의 표정은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다. 아주 오래전 내내 옆에서 지켜보았던 사랑을 고백하는 그 빛나던 얼굴은 결단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껍데기뿐이라도, 네가 나를 향해 마주 보고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저 뿌리치지도, 잡지도 못하고 바라보다가 백호를 안아주었다.

 

“그러자.”

 

아아, 뚫린 가슴으로 썩은 사랑이 흘러내린다.

그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백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지쳐서, 그저 사랑에 아주 많이 지쳐서 쉴 곳으로 나를 택한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를 받아주었다.

오래된 사랑이 이루어졌거늘 기쁨 하나 없다.

 

 

 

​​​***

 

 

 

​​​삐- 삐삐- 삐.

매번 울리는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힘들어. 조금만 더 자고 싶어. 어제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다가 겨우 새벽에 잠들었는데. 일찍 잘걸. 매번 날 깨운 알람 소리에 후회가 물결처럼 밀려온다. 체온에 데워진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다가 고개 돌려 옆을 보니 이미 백호는 아침 운동을 나갔는지 침대 한편이 비어 있다.

아침 5시 50분. 9시 출근인 나에겐 꽤 이른 기상이다. 고등학생 때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 때문에 더 일찍 일어난 적은 있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런 새벽 기상은 없었는데.

그때도 지금도, 이런 새벽 기상의 이유는 강백호다.

움직이자. 생각하지 말고 일단 움직여. 따뜻하고 끈적하게 내 몸에 달라붙는 이불을 걷어내고 눈을 다 뜨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나와 냉장고를 연다. 전날 씻어놓고 불린 현미 쌀을 밥통에 넣고 취사 버튼을 누른다. 또다시 냉장고를 열어 어제저녁에 만들어둔 간장 닭찜을 꺼내며 냄비에 넣어 데운다. 동시에 아침에 먹을 계란과 우유, 미리 다져놓은 야채 블록을 섞어 계란말이를 준비한다. 소금이나 설탕은 넣지 않는다. 아침에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기 힘들어서 이렇게 전날 미리 최대한 준비를 해 놓아야 이렇게 편하다.

찬장을 열어 백호의 도시락통과 2L는 거뜬히 들어갈 거대한 물병을 꺼낸다.

 

“오늘 도시락은 현미밥에, 구운 두부랑 간장 닭찜이랑. 음…. 파프리카 넣은 샐러드.”

 

나이 먹으면 혼잣말이 많아진다더니, 오늘의 메뉴를 복기하듯이 중얼거리며 아침을 준비하는 나는 허물뿐이라지만 백호와 사귀고 생활이 크게 달라졌다.

멀쩡히 있는 자신의 집을 두고 내 집에서 눌러앉은 백호 때문에 무려 요리를 시작했다. 나는 집에서 밥을 먹을 일이 크게 없었고, 먹는다 해도 그냥 배달 음식을 먹거나 컵라면이었는데 백호에게까지 배달 음식이나 인스턴트를 먹일 수는 없다. 덕분에 퇴근하면서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드는 날이 많아졌는데 백호는 내 요리가 입에 맞았는지 설거지하며 투덜거렸다.

 

“구단에서 운영하는 식당 밥은 진짜 최악이야.”

“그래도 영양소는 더 골고루 먹을 수 있지 않나?”

“눗, 영양소만 계산해서 섞어놓은 무언가라니까! 호열이 네가 해주는 밥처럼 맛있지 않아. 근데 안 먹으면 근육 빠지니까 그냥 배 채우기로 먹는 거지.”

 

그러니 구단 고위 관계자와 식당 관계자가 혈연관계이거나 친한 지인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며 백호는 세상 풍파에 찌든 말들을 뱉어낸다. 오, 음식으로 웬만하면 푸념하지 않는 백호가 저 정도로 질색하다니. 얼마나 최악이라는 걸까.

솔직히 요리? 귀찮다. 나는 맛보단 배만 채우면 된다는 사람이어서 나에게 요리는 쏟아붓는 시간 대비 효율이 없는 행위라고 생각하지만.

 

“……그럼 내가 도시락 싸줄까?”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내 말에 당연히 백호는 눈을 빛내며 좋다고 했고. 어차피 아침 준비하면서 그 반찬들로 도시락 싸면 되지 않을까,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시작한 것도 맞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아침과 점심을 똑같은 반찬으로 먹으면 질리지 않나? 물론 백호는 전혀 불만 없이 오늘도 덕분에 잘 먹었다며 늘 빈 도시락통으로 가져왔지만. 왜인지 마음이 불편해져서 퇴근길에, 서점에서 <10010가지 식단 도시락 레시피 모음집> 책을 구매해서 조금씩 다르게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요리는 매우 번거롭고 귀찮다. 분명 레시피대로 만들었는데 맛이 엉망일 때도 있고, 재료를 다듬으면 음식물 쓰레기도 나온다. 설거지도 엄청나게 나오고. 어차피 무늬만 연애질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오! 맛있는 냄새!”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침 운동을 끝낸 백호가 들어온다. 땀에 젖은 몸으로 내 옆에 와서 오늘은 도시락 뭐야? 묻는 그의 얼굴을 보면.

 

“단호박 들어간 간장 찜닭.”

“후눗! 닭고기!”

 

그래, 이렇게 웃는 백호의 얼굴을 보면, 귀찮다느니, 번거롭다느니 그런 생각은 달군 프라이팬에 떨어진 버터처럼 스르륵 녹아 사라진다. 그래, 이게 뭐 별거냐. 백호가 저렇게 계속 웃으면 그걸로 된 거지.

 

“백호야, 얼른 씻고 나와. 아침 먹자.”

 

함께 하는 시간이 흐를수록 집안의 전경이 바뀐다.

옷장에 정리되었던 재킷과 셔츠들 사이로 트레이닝복들이 걸렸다. 화장실의 칫솔이 두 개. 물컵은 하나. 백호를 위해 침대를 주고 소파에서 자려는 나를, 강백호는 억지로 끌고 와 함께 붙어 자서 좁은 싱글 침대 위 베개가 두 개. 식탁 위 식기는 늘 맞은편에도 함께 놓고, 물을 많이 마시는 백호를 위해 수돗물은 배탈이 날 수 있으니, 보리차가 떨어지지 않게 잔뜩 끓인다.

가끔 취미로 필사하는 나를 위해 백호가 사 온 만년필과 잉크는 책상 서랍 속에. 밑창이 떨어질 때마다 내가 백호를 위해 사 온 운동화는 신발장에.

오늘은 자신이 요리하겠다며 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차려진 저녁상. 좁은 침대에서 서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다가 잠드는 밤들.

 

그렇게 네 번의 계절이 흘러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행히 백호는 여름날의 푸른 나무처럼 싱그러워졌다. 흐렸던 고동빛 눈동자는 다시 맑게 빛나기 시작했고 낯빛은 물을 잔뜩 머금은 봉숭아꽃 같다.

다행이야. 나를 보고 맑게 웃는 백호를 바라보며 나는 가까워지는 이별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언제 이야기할까. 언제 너를 떠나보낼까. 너는 이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 같아.

그렇게 계속 너와의 헤어짐을 홀로 준비하다 차창 함박눈이 쏟아지는 추운 겨울의 날에.

우리가 함께 자주 왔던 이 카페에서. 테이블 위로 올려진 차가운 내 손을 네가 한참 쭈뼛대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얽혀 맞잡는 순간. 그 온기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이구나.

이제 백호는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고 확신했다.

 

“호, 호열아. 있잖아.”

“백호야.”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불렀고, 백호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나부터 먼저 말하라고 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내 손을 잡은 그 온기를 느끼다 입술을 떼었다.

 

“우리 헤어지자.”

 

갑작스러운 내 말에 매우 놀란 듯 멈춰있던 백호는 스르르 맞잡은 손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뭐라 말도 없이 나를 바라본다.

 

“왜, 왜?”

 

이별에 이유를 찾는다. 그렇구나. 지난 이별들에도 이유는 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하기엔 처음 시작부터 이 관계는 잘못되었기에 나는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냥.”

 

제일 핑계 대기 좋은 말이다. 모호한 대답에 솔직히 한 대 맞을 각오까지 했는데 백호는 그저 입술을 꽉 깨문다. 저러다 피가 날까봐 마음이 조급해져 바로 말을 이었다.

 

“집에 있는 짐들은 다 정리해서 네 집으로 보내줄게.”

“……내 집?”

 

백호의 표정이 묘하게 찌그러졌다. 화가 난 듯 무어라 말하려다가도 목에 가시가 걸린 듯 입만 벙긋거리다 다시 입술을 꽉 깨물며 백호는 사납게 눈을 치켜뜬 채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저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걸까. 왜 네가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거야? 이래서야 꼭, 너도 날 사랑한 것 같잖아.

한참을 이어진 껄끄러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백호도 따라 일어난다.

이 카페를 나서면 이제 연인 놀이는 끝이다.

펑펑 눈이 내리는 카페 앞에서 여전히 날 바라보는 백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백호야. 나중에 또 보자.”

“나중에 언제?”

 

이제 백호의 얼굴은 꼭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다. 왜 그리 슬픈 표정을 지어? 우리는 그저 필요에 의해 잠시 함께한 것뿐이잖아. 너는 관심과 온기가 필요했고, 나는 네가 필요했으니 나쁘지 않은 시간 아니었나.

나는 백호의 물음에 그저 미소를 지은 채, 그새 눈이 소복하게 쌓인 그의 머리칼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쓸며 안녕을 고했다.

 

“……눈이 많이 온다. 조심히 가.”

 

그렇게 말뿐인 연인관계는 끝을 맺었다.

다시 원래대로 친구로 돌아간 것이다. 다시 친구.

돌고 돌아서 다시.

열두 번의 달, 네 번의 계절을 함께한 시간을 끊고 돌아가 다시 홀로 선다고 해도 자신이 있다. 지금까지 난 혼자였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기까지 했다. 그러다 집에 홀로 들어와 현관문을 닫았을 때.

쏟아지는 고요함 사이 신발장에 깔린 흰 타일 위로 놓인 구두들 사이에 운동화.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보이는 식기들. 두 개의 칫솔과 하나의 물컵. 침대 위 두 개의 베개.

고작 1년이었는데. 집에 이리 백호의 물건들이 가득 찼을까.

껍질뿐이었던 연인관계였어도 이별은 이별인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몸을 움직여 눈에 보이는 대로 집 구석구석에 놓인 백호의 물건들을 커다란 택배 상자에 넣으면서 무언가 공허함을 느꼈다.

백호가 연애를 끝내고 느끼는 감정이 이런 것이구나.

일상을 나누는 사소한 대화들. 오늘은 몇 시에 집에 들어오냐는 문자 메시지. 예쁘고 좋은 것을 보면 사진을 찍어 보여주고 웃던 날들. 좋아하는 책의 구절을 읽어주면 더듬더듬 날것의 감상을 말하던 밤. 이제는 절대 할 수 없다.

그래, 이제는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뚫린 가슴 속으로 찬 바람이 분다.

백호의 집이 어딘지는 알고 있지만, 방금 이별했는데 차를 몰아 직접 짐을 건네주긴 왜인지 머쓱하여 우체국으로 가 선불 택배로 보내버렸다.

다시 돌아와 현관문을 여니 백호의 흔적이 지워진 온전한 나의 집이다. 온전히 나만의 물건으로만 채워진 내 집.

공허함에 청승맞게 홀로 눈물을 흘린다던가 그러진 않았지만, 다른 쪽으로 곤란한 상황이 생겼다.

더 이상 이른 새벽에 밥을 준비하기 위해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데 항상 눈이 먼저 떠졌다. 그동안 요리를 한 것이 익숙해져서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들려고 하면 나도 모르게 4~5인분으로 만들어버려서, 한동안 주변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했다. 이젠 침대 한가운데서 편히 잠을 자도 되는데 자꾸 침대 끝에 몸을 옆으로 누워 잠든다. 그것도 한참 뒤척이다가 겨우겨우 잠이 드는 것이다.

거울을 보니 누가 봐도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자 수척한 사람이다. 불면은 직장생활에도 영향을 주어서 수면제라도 처방을 받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건조기에서 꺼낸 빨래 더미에서 백호가 입던 검은 민소매 셔츠를 발견했다.

아, 빨래 바구니 속에 있어서 못 돌려줬구나. 이걸 어쩌지? 버려야 하나? 고민하던 내 눈앞에 침대 위 놓인 아직 처분하지 못한 백호가 쓰던 베개가 보였다.

백호의 셔츠와 베개.

이때 나는 수면 부족으로 판단력이 많이 흐려진 상태였다.

 

“…….”

 

그리고 생각보다 판단력이 흐려진 사람은 기괴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나는 홀린 듯 백호의 셔츠를 망설임 없이 베개에 옷 입히듯 쑤셔 넣었다. 목 라운드가 넓어서 베개는 수월하게 셔츠를 입었다. 셔츠를 입은 베개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것을 껴안고 침대에 누웠다. 세상에.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진짜 추잡스러운 짓 아닌가. 건조기에 방금 빠져나온 셔츠는 아직 뜨거운 온기를 품고 있어서, 그 어느 날 함께 잠들었던 밤들이 생각나 눈이 스르르 감긴다.

 

“우와.”

 

아니 진짜냐고.

베개를 끌어안은 채로 눈을 뜨니 아침이다. 꿈도 안 꾸고 그냥 잠들었다. 깊은 잠을 잔 덕에 정신이 아주 맑다. 생각보다 효과가 너무 좋아서. 조금 찌질하긴 하지만, 이 베개만 있으면 불면증 걱정은 없겠다 싶다. 그래, 잠이라도 이제 잘 자게 되었으니 잘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때때로 뚫린 가슴으로 찬 바람이 부는 것처럼 공허함을 느낄 때가 오히려 더 많아졌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또다시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시간이 날 때마다 백호와 함께 다녔던 장소를 다니기 시작했다. 카페에 앉아 문이 열릴 때, 혹시나 백호일까 고개를 기웃거리며.

네가 내리던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으면 우연히 마주치진 않을까.

함께 장을 보던 그 마트에서 빈 카트를 끌고 몇 바퀴를 돌다가 마트 유리에 미친 내 모습이 참으로 우스웠다.

백호의 소식을 궁금해하다가도, 군단 녀석들에게는 절대 묻지 않았다. 백호가 어서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라면서도, 나와 함께했던 시간은 잊지 않았으면 했다. 사랑이 없이 시작했지만 그래도 나름 행복하지 않았을까.

아닌가? 나만 행복했나.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

다시 돌아와 달라 잡지도 못하고, 마음 편히 보내주지도 못하면서. 함께 한 장소들을 돌아다니며 우연을 가장해 혹시라도 마주치지 않을까 멋대로 기대하면서도, 군단 녀석들과의 약속에는 정말로 마주쳐 버릴까 봐 나가지 않는. 그런 겁쟁이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시간은 무심히도 겹겹이 쌓여갔다.

 

 

 

​​​***

 

 

 

​​​창밖의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어느새 태양이 높게 떠올라 쏟아지는 햇살이 제법 뜨겁다.

온전한 봄이다.

이제 일어나야지. 점심시간이 되면 손님들로 붐빌 테고, 영업장에서 혼자 이렇게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실례이니.

이제 일어서야겠다 하는데 누군가가 내 맞은편의 의자를 끌어내 털썩 앉는다. 내가 일어나려 하니 자리를 맡은 건가? 너무 밖을 바라보고 있어서 태양 빛에 시야가 하얗게 번지어 앞이 흐리다.

그 흐릿한 시야임에도 투명하게 반짝이는 붉은색이 보여서.

 

“오랜만이다.”

 

들려오는 익숙했던 목소리에 미처 대답하지 못했던 것 같다.

 

 

 

​​​***

 

 

 

​​​‘이, 이제 어떡하지.’

 

호기롭게 그 앞에 앉았으나 강백호는 혹시나 양호열이 뛰쳐나가지 않을까 잔뜩 긴장했다. 혹시 모를 도주 상황에 대비해 바로 붙잡을 수 있도록 한쪽 다리는 카페 문 쪽을 향하게 두었으나 호열은 도망갈 생각은 없는지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호를 바라볼 뿐이다.

정말 만날 줄은 몰랐지만, 이 카페에 문을 열고 들어갈 때 강백호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호열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연이라는 것에 기대어 만남을 기대했었다.

그리고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 아래 풍경을 바라보는 호열을 발견하고 단 하나의 생각만 하면서 다가간 것이다.

놓쳐선 안 된다는 그 생각 하나만으로.

 

“오랜만이다.”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

강백호의 눈길이 빠르게 호열을 살핀다. 그래도 걱정했던 것 보다 안색이 나빠 보이진 않아 조금 안심하면서도 서운함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서운함을 얼굴에 나타내기엔 강백호도 양심이란 것이 있어서. 그는 호열을 똑바로 바라보고, 헤어졌던 시간 동안 닿지 못했던 말들을 전하리라 다짐한다.

 

“호열아.”

 

 

 

​​​***

 

 

 

​​​헤어지던 날. 호열은 웃으며 나중에 또 만나자고 했지만, 그 이후 군단들의 모임에서 호열을 볼 수는 없었다. 혹시 자신 때문에 그런 걸까? 구식, 대남, 용팔에게 호열의 소식을 물으면 순순히 대답은 하는 것이 친구들과 연락을 끊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궁금하면 네가 전화하면 되잖아, 따위의 말에 대답을 못 하고 우물거리기만 했다. 그러니까, 무슨 염치로 내가.

 

“……후.”

 

그러니까, 강백호는 자기 잘못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호열을 붙잡은 것. 호열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이용한 것. 천재 스포츠맨에게 어울리지 않는 저열하고 비열한 짓이었다.

아마 양호열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굉장히 눈치가 빠르니까. 그럼에도 자신의 장단에 어울려주는 호열을 보면서 강백호는 따끔거리는 양심을 외면하고 그의 사랑을 받아먹었다.

전 연인들과의 빈자리 틈으로 불어오는 외로움을 견디기가 힘들어서 아예 그의 집에 찾아가 자리 잡고 더 뻔뻔하게 애정을 요구했다. 그리고 호열은 기꺼이 백호에게 사랑을 쏟아부었다.

다정한 눈길, 걱정하는 마음,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나누고, 백호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호열의 동력은 그를 향한 사랑이었다. 그러니 호열이 싸준 도시락을 구단 식당에서 펼쳤던 날. 죽을상으로, 입속으로 음식을 쑤셔 넣던 구단 선수들의 이목이 쏠린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강백호! 그거 뭐야! 도시락?!”

“편의점 도시락이 아니잖아? 우와! 너 그새 애인 생겼냐?”

“대박! 여자 친구분이 만들어 주신 거야?”

“일반식 아닌 거 같은데? 현미밥에, 이거 식단이네!”

 

여자 친구? 애인?

같은 구단 선수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강백호는 잠깐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어-. 애인……인 건가? 애인, 이겠지. 일단, 사귀는 거니까.”

“뭐야? 그 말투는. 애인이니까 이런 거 만들어 주는 거지!”

“야야야! 한 입만 줘!”

“후눗! 저리 가! 손대기만 해봐!”

 

도시락을 노리는 젓가락들을 쳐내면서 강백호는 가슴의 따끔거림을 느낀다.

애인, 연인.

무겁다. 지금껏 생각 없이 받아먹기만 했던 사랑의 무게가 비로소 느껴진다.

 

“이놈들아, 백호 싫어하는 거 안 보이냐! 남의 애인이 싸준 도시락 뺏어 먹으면 좋아? 너희 밥이나 먹어!”

 

구단 감독의 불호령에 그제야 우우우~ 볼멘소리를 내며 선수들이 물러난다. 강백호는 가까스로 사수한 호열의 도시락을 먹으며 생각했다. 맞아, 그렇지, 호열이는 지금 내 애인이지.

호열이 아침잠이 많은 것은 중학교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 애가 강백호가 식당 메뉴에 불만을 표한 날부터 항상 아침 러닝을 뛰고 오면 부엌에서 아침 식사와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다. 아침도 안 먹는 사람이 강백호의 아침 차려준다고.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무엇이란 말이야.

호열은 백호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쏟아준다. 그럼, 자신은 호열에게 무엇을 주었나. 외롭다는 이유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잡아두고 사랑만 받아먹는 사람이 지금의 강백호다.

강백호는 운동을 모두 마치고 당연하게 호열의 집으로 돌아간다. 문을 열면 이제는 익숙한 집안의 전경에, 땀으로 젖은 옷들을 빨래에 넣고 돌린 후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한다. 타일 구석의 물때들을 발견하고 변기 옆 솔을 집어 박박 닦는다. 호열은 이런 틈새 청소는 신경을 잘 안 써서 자신이 항상 눈에 보일 때마다 청소하는 편이다. 닦는 김에 욕조와 거울도 뽀득뽀득하게 닦는다. 샤워 겸 욕실 청소를 끝마치고 나오면 건조기에서 잘 마른 세탁물들을 들고 와 소파에 쏟고 강백호는 빨래를 개기 시작한다.

호열은 항상 백호보다 늦게 퇴근하기에 백호는 자신이 집에 오면 할 수 있는 집안일들을 처리한다. 호열의 청바지와, 자신의 트레이닝 바지를 한 서랍에 넣으며 빨래 개기가 마무리되면, 더플백에서 도시락통을 꺼내어 설거지한다. 자신을 위해 매일 일찍 일어나 도시락까지 싸주는 호열이, 집에 왔을 때 집안일 하나라도 덜 하게 하고 싶었다.

바닥 청소기를 다 돌릴 때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마트에서 장을 본 호열이 들어온다.

 

“백호야, 다녀왔어.”

“어서 와! 짐 나 줘!”

 

백호는 후다닥 호열이 들고 있는 짐들을 가져와 정리하며 내일의 메뉴를 가늠한다. 오늘은 돼지고기가 좋은 게 들어왔다는 호열의 말에 백호는 늘 고맙다며 웃는다.

 

“고맙기는,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정말 별일 아니라는 듯 호열은 하하! 웃으면서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가고, 곧이어 우와앗! 화장실이 깨끗해졌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던 강백호는 즐거웠다.

생각만큼 요리가 맛있게 되지 않았다며 당황한 뒷모습. 밤에 안경을 쓰고 스탠드 조명의 그 주홍빛 아래에서 책을 읽는 그 얼굴을 지켜보는 것은 강백호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반듯한 이마를 덮은 앞 머리칼을 버릇처럼 쓸어올리며, 입술을 움직여 글을 읽는듯한 호열의 모습은 지켜보는 강백호에게 왜인지 평안함을 주었다. 그러다 졸음을 이기지 못한 강백호가 호열을 부르면 곧바로 책을 덮고 안방의 침대로 왔는데, 좁은 침대에 두 사람이 붙어 누구 한 명이 먼저 잠들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행복해.

 

문득 강백호는 생각했다.

내가 언제부터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지? 공허함을 언제부터 생각하지 않았더라?

호열과 이제는 단골이 된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호열과 함께 산 지 1년째.

유난히 함박눈이 쏟아지던 날.

그 눈을 바라보는 호열의 말간 얼굴을 보며 그는 비로소 자신의 빈 가슴에 사랑이 차오름을 느꼈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호열의 손이 좋다. 항상 깔끔하게 넘기는 머리칼도, 그을리지 않은 하얀 피부도, 초승달같이 휘어져 웃는 눈매도. 언제나 깨끗한 그의 단정한 옷차림도.

그러니까, 강백호는.

양호열이 좋았다.

사귀면서 저 손을 잡았던 적이 있었나? 껴안았던 적도 없었는데. 호열은 이 이상한 연인관계에 결코 의문이나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이제는, 조금은 연인다운 행동을 해도 되지 않을까?

테이블 위로 올려진 호열의 손이 보인다. 잡아도 될까? 괜찮을까? 놀라진 않을까. 한참 쭈뼛대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가락을 얽혀 맞잡는 순간. 호열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짓는다.

그래, 오래 기다리게 했다.

강백호는 이 미소를 계속 보고 싶다 생각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호열이 늘 해사하게 웃길 바랐다.

 

“호, 호열아. 있잖아.”

“백호야.”

 

동시에 서로를 부르고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강백호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호열에게 먼저 말하라 했고, 호열이 말이 끝나면 꼭 사과하자.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나의 이기심으로 시작된 이 관계이지만 우리 이제 잘 해보자고 이야기하리라.

하지만 호열의 입술에서 떠나온 말은 이 한겨울의 추위보다 더 차가웠다.

 

“우리 헤어지자.”

 

잘 벼른 칼날이 가슴을 꿰뚫은 느낌이다.

 

“왜, 왜?”

 

이유를 알면서 이유를 묻는다. 두 사람의 시작부터가 잘못되었다. 애초에 이 관계는 자신의 이기심으로 얽혀진 것이기에 함께하며 호열이 지쳤을 수도 있다. 사랑만 받아먹은 대가인가. 강백호는 목구멍 밑으로 솟아오르는 수많은 말들을 꺼낼 수가 없었다.

네 사랑의 깊이를 이제야 알고 나도 이제 그 사랑을 돌려주려 했는데 너무 늦어 버린 것일까. 질린 걸까. 지친 걸까.

그런 것이기엔 눈이 내리는 카페 앞에서 머리칼 위 쌓인 눈을 털어주던 그 손길은 여전히 다정했는데.

강백호는 울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이 눈물을 보인다면 다정한 호열은 또 자신의 곁에 남겠지. 그런 식으로 또다시 옭아매기는 싫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쏟아지는 눈 속으로 사라지는 호열을 바라보며 강백호는 홀로 남아버렸다.

 

 

 

​​​***

 

 

 

​​​1년의 만남, 1년의 이별.

다음날 도착한 커다란 택배 상자에 담긴 자신의 물건들을 보며 강백호는 이별을 실감했다.

이제 자신은 호열의 집에 갈 수 없다. 당연하게 들어갔던 그 집에 들어갈 수 없고, 연락도 할 수 없다. 아니, 친구로는 할 수 있겠지. 그러나 이제 강백호는 양호열과의 ‘친구’는 싫었다.

양호열의 곁에 있고 싶다. 조금 부은 눈을 겨우 뜨며 아침을 만드는 그의 얼굴을, 강백호가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반짝이는 그 눈동자를, 자신을 향해 활짝 웃는 그 미소를 다시 보고 싶었다.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고 싶었으나, 아마 호열은 거절할 것이다. 가볍게 이런 헤어짐을 고하는 성격이 아님을 알기에 강백호는 기다렸다. 기다리며 호열과 함께했던 기억을 곱씹었다.

사랑.

역시 이 모든 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이제 강백호는 가슴 속 차오른 사랑들을 쏟아부을 준비가 되었다. 처음 시작은 참으로 갑작스러웠고 충동적이었으나 자신에게 부디 두 번째 기회가 온다면 신중하게 잡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왔다.

 

“호열아.”

 

강백호는 호열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 속에서 아직도 사랑이 묻어나옴을 느낀다. 그는 자세를 고쳐잡았다. 심장이 마구 뛰고 손끝은 떨리나 호열을 바라보는 그 표정만은 단단하다.

 

“양호열 씨.”

 

직접 쓴 고백의 편지도, 건네줄 향기로운 꽃도 없다. 갑작스러운 이 만남이 언제 또다시 깨질지 모른다.

창밖에 봄 햇살이 쏟아진다.

같은 장소, 다른 계절에서.

강백호는 호열에게 손을 내밀었다.

 

“좋아합니다.”

 

흔들리던 호열의 검은 눈동자가 강백호에게 고정된다.

 

“저랑 사귀어 주시겠어요?”

 

호열은 이 얼굴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아주 오래전 내내 옆에서 지켜보았던 사랑을 고백하는 얼굴이다. 그 빛나던 얼굴이 이제 자신을 향하고 있다. 그때와는 달라.

좋아한다는 말이 부드럽게 자신의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자신을 향해 뻗은 손을 바라본다.

사랑.

우연에 기대 백호와 마주치길 바라며 헤매던 날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 날들이 쌓이고 쌓여 바로 오늘.

오늘은 어쩌면.

 

햇빛을 오래 본 듯 다시 흐려진 시야에 눈꺼풀을 깜빡이니 눈이 녹아 물방울이 떨어지듯 망울망울 그의 뺨을 타고 흐른다. 차마 닦을 생각조차 않고 호열은 아주 천천히 그의 손을 잡았다.

 

“……좋아요.”

 

이제는 뚫린 지 오래된 가슴에 사랑이 스며든다.

예전부터 사랑을 말하는 백호는 멈추는 법이 없다.

호열의 대답에 그는 웃으면서 그대로 맞잡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강백호는 호열에게 고백했다. 사랑을 깨달은 백호는 함께 걸어갈 이로 호열을 선택했다. 이제 호열은 그의 마음을 안다.

오래된 사랑이 이루어져 기쁨이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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