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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 싶은 말은

솜사탕

이무진 - 청혼하지 않을 이유를 못 찾았어

헌신하다가 헌신짝된다. 멋드러지게 기른 콧수염 밑으로 입에 담배를 문 구식이 뱉은 말이었다. 그것은 고등학교 졸업 후 돈을 벌기 시작한 친구에게 건네는 조언이 아니라, 코찔찔이 시절부터 연애사를 지켜봐 온 친구에게 건네는 진심 어린 충고였다.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별거 아니라는 듯 말을 받아치자 구식은 혀를 끌끌 찼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타박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터졌다. 으하하. 검푸르게 물든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졌다. 떨어지는 빗방울 사이로 내뱉는 담배 연기에 한숨을 실어 보냈다.

 

“나도 알아 인마, 근데 적당히가 안 돼 이제.”

 

1학년 여름, 산왕과의 경기에서 부상을 당한 백호는 그 후 꼬박 1년을 재활치료에 힘썼다. 다시 여름이 되고 백호가 학교로 돌아오자 시간은 잠시 멈췄던 것처럼 그를 반겼다. 백호는 1학년에 머물렀고, 우리는 2학년이 되었다. 비록 다른 학년이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이 점심을 먹고 같은 계절을 보냈다.

늦게 시작한 농구였다. 선수 생활을 걸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다. 하지만 1년간 멈춰있었다는 생각에 참을 수 없었는지 백호는 훌쩍 달아난 시간을 전속력으로 쫓기 시작했다.

1만 시간의 법칙.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 1만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백호는 그 법칙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평일에는 10시간, 주말에는 하루 14시간~16시간씩 연습에 몰두했다. 그리고 스무 살의 여름, 3학년 2학기를 마친 백호는 장학생의 자격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는 그때의 강백호를, 꿈을 향해 온몸을 내던지던 강백호를 마음에 품었다. 처음에는 친구를 아끼는 마음이라고, 먼저 꿈을 찾은 친구니까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미래의 스포츠 스타를 응원하는 마음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마음 사이로 좋아하고 설레는 감정이 스며든 건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땐 좋아하는 마음을 감추고만 싶었다.

좋아하는 여자에 빠져 농구부에 들어간다고 난리를 칠 때만 해도 또 일주일 만에 때려치우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백호가 언제 그만둘지 내기를 하고 시시콜콜 농담 따먹기를 할 때만 해도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백호는 진심으로 농구를 대하고 있었고, 나와 구식이, 대남이, 용팔이도 진심으로 백호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땐 용돈을 벌어 응원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친구 간에 의리를 지켰다고 생각했다.

산왕과의 경기가 끝나고 백호가 병원으로 옮겨질 때까지만 해도, 백호는 괴물 같은 회복력으로 금방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날 거라 생각했다. 아니, 믿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2학기가 시작되고 모두가 자리로 돌아왔지만, 백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백호는 생각보다 오래, 아주 오래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처음엔 덩치 크고 목청 좋은 녀석이 빠지니 허전한 것이라 여겼다. 우리는 허전함을 잊기 위해 백호가 없이도 체육관을 찾았다. 하지만 농구코트를 휘젓고 다니는 빨간 머리의 녀석이 없으니 허전한 건 마찬가지였다. 왠지 농구코트마저 텅 비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백호를 대신해 농구부의 호식이나 재훈이, 중식이를 하루씩 끼고 다녔지만 헛수고였다.

백호가 없는 시간은 무료하게 흘렀다.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옥상에서 점심 도시락을 까먹을 때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고 사는 느낌이었다. 텅 비어버린 백호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백호를 찾았다. 이틀이나 삼일에 한 번, 학교가 끝나면 백호에게로 갔다. 교통비가 떨어지면 파친코에서 머신을 당겼다. 구슬이 챠르르 소리를 내며 후드득 떨어지면 맛있는 것을 사서 백호에게 갔다. 처음엔 다섯이 함께 모여서 즐거운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다함께 모이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다. 백호에게 농구가 있듯이, 다른 녀석들에게도 뭔가 몰두할 것이 생겼다. 물론 나에게도 몰두할 것이 생기긴 했지만, 여전히 백호를 보러 가는 게 더 즐거웠다.

어느덧 나뭇가지가 앙상한 겨울이 되었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 백호는 침대를 벗어나 운동재활센터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손님 의자에 앉아 텅 빈 침대를 보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재활훈련은 마친 백호는 병실로 돌아오자마자 앉아 있는 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호열아! 많이 기다렸냐? 나 오늘 재활훈련 있어서!”

 

이런 거 안 사와도 되는데. 백호는 싱글벙글 웃으며 협탁 위에 올려놨던 귤을 집었다. 노란 귤껍질을 다섯 갈래로 까서 반을 쪼개 한입에 넣고, 나머지 반을 내미는 녀석의 손길에 웃음이 터졌다. 망설임없이 받아먹은 귤은 눈을 찡그릴 정도로 셨다. 백호는 콧잔등을 찡그렸다가 펴더니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 건넸다.

 

“너 오면 줄라고 적어놓은 거야. 오늘 올 줄은 몰랐지만.”

 

종이에 적힌 것은 백호의 일과표였다. 거기엔 내가 모르는 강백호의 시간이 적혀 있었다. 별것도 아닌 글씨를 읽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어지러웠다. 백호가 입에 넣어준 귤이 명치 위쪽 어딘가에 꼭 막힌 것만 같다. 나는 그때야 깨달았다. 아…… 나는 백호가 몇 시에 아침을 먹고 오전엔 무슨 치료를 하고 점심시간은 언제고 오후엔 뭘 하는지, 아니면 쉬는 요일은 언제인지. 그런 게 궁금했구나.

 

나는…… 백호를 좋아하는구나.

 

 

 

***

 

 

“나 청혼하려고.”

“뭐? 청혼?”

 

오래도록 생각해온 말이었지만, 녀석들에게는 폭탄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결혼할 생각이 없다던 대남은 배신자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일반인 연애 프로그램 애청자인 용팔은 안경을 고쳐 쓰며 눈을 번뜩였다. 호열이 너 만나는 사람 없었잖아? 우리한테 숨긴 거냐? 누구야? 쏟아지는 두 사람의 질문 사이로 구식은 팔짱을 끼고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양호열이 드디어 결심했구만. 다 안다는 말투에 대남과 용팔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뭐야 노구식, 넌 다 알고 있었단 말이야? 무언가 해명을 요구하듯 대남과 용팔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테이블 가운데 놓인 오뎅탕에서 뽀얀 연기가 올라왔다.

 

“백호야, 강백호.”

 

상대의 이름을 들은 녀석들은 금방 질렸단 표정으로 흩어졌다. 그럴 줄 알았다. 뭘 맨날 그럴 줄 알았대? 알긴 뭘 알아? 아무것도 몰랐으면서. 이죽거리는 말투로 타박하자 용팔이 다시금 안경을 고쳐 썼다. 이봐 양호열 씨, 아무것도 모르는 건 너야. 우린 다 알고 있었어. 그 말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대남이 말을 보탰다. 근데 나는 니가 평생 고백은 안 할 줄 알았어. 그래서 말 안 하고 있었던 거라니까?

 

“양호열, 여기에 니가 강백호를 좋아한다는 걸 눈치 못 챈 놈은 아무도 없어.”

 

푹신한 의자에 묻혀있던 구식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가락으로 정확히 나를 가리켰다. 뜻밖의 말에 혼란스러운 눈으로 녀석들을 훑어보자 대남은 혀를 끌끌 찼다. 뭐 처음엔 같은 거 달린 친구 놈을 좋아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갔는데 말이야. 근데 그냥 니네는 좀 달랐어. 오랜 시간 묻어온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녀석들은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의 생각을 떠들어 댔다. 당연하지, 얘가 강백호 챙긴 게 대체 얼마냐? 난 엄마인 줄 알았다니까. 아니 엄마보다 더하지. 우리 엄마는 내 엉덩이 걷어차는 게 일이야. 어쨌든 양호열이 강백호한테 지극정성이었다는 얘기지.

녀석들이 나와 백호에 대해 떠드는 소리가 술집의 소음에 섞였다. 언제부터 나와 백호를 지켜봤던 걸까. 누구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마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속앓이만 했던 지난날이 문득 외로워졌다. 이렇게 알아줄 줄 알았더라면, 이렇게 품어줄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털어놓을 걸 그랬나. 비어있는 잔이 쓸쓸해 보여 술을 가득 채웠다.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드는 술은 미지근했다.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 신이 나서 떠들고 있는 녀석들을 힐끗 보곤 오뎅 꼬치를 입에 물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생각보다 시시콜콜한 감상들이었다.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니들이 제일 잘 아는 척을 한다고 해도, 백호랑 나 사이에 있던 일을 알 수는 없을 거다.

 

이제는 뉴스에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해진 백호는 잘 나가던 미국 생활 중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왔다. 백호의 소속팀과 MOU를 맺은 국내 프로농구팀으로 1년 임대하는 방식이었다. 올림픽 출전을 위해 국내팀에서 뛰고 싶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친 강백호 선수를 놓칠 수 없던 미국 소속팀이 내린 결정이라는 명분은 그럴싸했다. 왁자지껄하게 치러진 백호 환영식에서 군단 녀석들은 애국열사 강백호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백호가 돌아온 진짜 이유는,

 

“호열아, 우리 같이 살까?”

 

백호는 꼭 그럴 때만 우리라는 말을 썼다. 하지만 종종 군단 녀석들과 있을 때도 우리라는 말을 썼기에 나로서는 그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때는 백호와 연애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백호가 이름이 알려지고 난 뒤로는 그 생각도 접은 지 오래였다. 뭘 같이 살아? 내 말에 백호는 싱글벙글 웃기만 할 뿐이었다.

백호는 끝내 나의 작은 전셋집으로 들어왔다. 마음에 드는 집을 살 때까지만 지내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게 말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구단 측에서는 간판스타인 백호에게 임시거처라며 커다랗고 층고 높은 아파트를 내어주었지만, 백호는 거절했다. 백호의 결정을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이해하기로 했다.

백호와 함께 살기 시작한 후 가장 먼저 바꾸게 된 건 침대였다. 백호의 키에 맞는 침대가 들어갈 만한 방은 내가 쓰고 있는 큰방밖에 없었다. 백호에게 그 방을 내어주고 작은방을 쓰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백호는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잘 것을 요구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잠시 갈등했지만 애초에 강백호의 고집을 꺾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뿌리치기에는 너무도 달콤한 제안이었다.

한 번의 커다란 파도가 지나간 일상은 잔잔한 물결처럼 흘렀다. 백호는 매일 연습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나를 끌어안은 채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숨을 들이켰다. 한참을 그 뜨끈한 품에 안겨있으면 백호는 고개를 들고 눈을 맞춰왔다. 양호열 냄새 좋다. 그 말이 뭐라고 그렇게 듣기 좋았다. 나는 매일 샵을 일찍 정리하고 들어와 백호를 기다리게 되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백호는 경기가 없는 주말이면 강아지처럼 하루종일 나를 졸졸 쫓아다녔다. 그리고 틈만 나면 나를 끌어안았다. 무언가를 자꾸 가슴팍에 욱여넣으려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듯이.

 

“호열이 너랑 있으면, 진짜 집에 온 것 같아.”

 

백호가 돌아온 진짜 이유는 향수병이었다. 백호는 침대에서도 내 품을 찾았다. 저보다 훨씬 작은 가슴에 어떻게든 머리를 들이밀었다. 품에 얼굴을 묻고 코를 킁킁거리던 백호는 가끔 속엣말을 끄집어내듯이 말했다. 미국 소속팀에 있어도, 미국 집에 있어도 어딘가 가슴이 뻥 뚫린 것만 같았다고, 이제야 집에 온 것 같다고, 이제야 숨 쉬는 것 같다고. 그리고 웃었다. 아니,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어 품에 안긴 백호의 빨간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가슴팍에 닿아오는 백호의 숨을 따라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내쉬는 숨을 감출 수 없어서 손끝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

백호를 껴안고 있으면 침실은 끝을 알 수 없는 우주가 되곤 했다. 까만 밤, 창을 비집고 들어온 희미한 빛이 백호의 이마에 닿았다. 새액, 새액.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얼굴을 손가락으로 덧그리다가 코끝에 멈췄다. 토독, 토독. 코끝을 건드리던 손가락은 끝내 입술에 닿았다. 색이란 것은 쉽게 옮겨가는 걸까. 조금 닿았다고 붉게 물드는 손끝에 마음이 하염없이 벅차올랐다. 달빛을 받아 환해진 그 빨간 머리카락에 천천히 키스했다.

이 우주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천체가 있다면 그건 강백호를 품은 별일 것이다.

 

 

 

***

 

 

별에 궤도가 있는 것처럼 삶에도 궤도가 있을까.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을 갖고 반려를 만나 아이를 낳는 일을 누군가는 삶의 순리라고, 혹은 인생의 숙제라고 했다. 하지만 정해진 궤도란 건 사실 없다. 지구에 사는 80억 명의 사람은 저마다의 인생이 있고, 저마다의 길이 있다. 설령 정해진 궤도가 있다고 해도, 연애할 생각도 결혼할 생각도 없이 바다를 부유하는 해파리처럼 둥둥 떠다니는 내게는 먼 이야기였다.

인생을 살면서 특별하게 바라는 게 있었나? 그냥 이렇게 백호 곁에서 백호의 시간을 지켜봤으면 좋겠는데, 욕심인가? 그렇지만 이 정도는 욕심부려도 되지 않나? 친구라서 안 된다면, 그렇다면 연인이라면 가능할까.

너와 내가 연인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너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까.

 

1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백호는 1년간의 임대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전보다는 밝아진 모습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백호가 미국으로 가기 전날 밤. 우리는 지난 1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나란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난여름 어느 날에 붙여놓은 야광별 스티커가 반짝였다.

 

“호열아.”

“응.”

“나 너 무지 보고 싶을 거 같다.”

“나도.”

“호열아, 우리 같이 살까?”

 

백호는 1년 전 이맘때와 꼭 같은 말을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농구선수 강백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농구일 것이고, 농구선수로 활동한다는 건 할 수 있을 때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강백호의 곁에서 영원히 소소한 일상을 보내고 싶었지만, 세상에는 마음대로만 해서는 안 된다는 법칙도 존재하므로.

 

“나중에, 나중에 생각해보자.”

 

나중에, 라는 말은 얼마나 아득한가. 언제까지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운 것만큼이나 아득하지 않을까. 나는 백호에게 확신을 줄 수 없었다. 그냥 언제일지 모르는 그때로 대답을 미뤄버렸다. 그때에 가면 너에게 더 좋은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한참이나 내 눈을 응시하던 백호는 촉촉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보고 싶을 거야.”

“그래, 나도.”

 

백호는 단단한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꼭 끌어안긴 품에서 쿵쿵 뛰는 심장과 뜨거운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팔을 뻗어 백호의 등을 감쌌다. 예전보다 훨씬 더 단단해진 등.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봐야만 느껴지는 흉터. 나와 백호는, 이따금 까무룩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면서 이 밤이 다 지나도록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하얀 새벽빛과 희미해진 야광별 스티커 아래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 백호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었다. 백호는 일렁이는 눈빛으로,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표정으로, 코트 위에서 농구공을 끝까지 쫓던 표정으로 내 턱을 쥐고 살며시 입술을 포갰다. 맞닿은 입술은 까끌거렸던가. 감촉을 다 느끼기도 전에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뜨거운 혀에 정신을 놓고 말았다. 말캉한 살덩이는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간질이며 혀를 옭았다. 엉킨 혀를 쉴 새 없이 비벼대며 정신없이 서로의 체액을 빨아댔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침을 맞이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의 안녕을 빌었다.

 

 

 

***

 

그리고 지금,

 

“여어 양호열 진짜 가냐?”

“응. 다녀올게.”

“뭘 다녀와? 오지 마라~”

“그래. 너 혼자 오지 말고 나중에 백호랑 같이 와~”

 

군단 녀석들의 응원 비슷한 걸 받으며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대화방에 남겨두었던 주소를 따라 무작정 찾아간 백호의 집은 낯설었다. 유명한 선수가 사는 집이라 그런가. 담벼락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높았고, 방범 시스템도 고급으로 갖춰진 듯했다. 대문마저 크고 두꺼워서 어쩐지 백호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백호는 혼자 산다면서 왜 이렇게 큰 집을 구했을까. 외롭다고 했으면서.

백호의 얼굴을 보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하지? 그런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청혼하기로 결심하고 태평양을 건너 먼 미국 땅에 있는 백호의 집 앞까지 찾아왔지만, 초인종을 누르기까지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대문 앞에서 한창 서성거리니 지나가던 노년의 여성이 다가와 길을 잃었냐며 물었다. Hello? Sweet kid, are you lost? 키드, 라고 불릴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I'm fine. Thank you. 짧은 대답과 함께 미소를 날린 뒤, 더는 서성거리기에 눈치가 보여 초인종을 눌렀다.

 

“Who is it! 어? 호열이?”

 

낯선 언어임에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삐익-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고, 멀리 현관문을 열고 뛰어나오는 빨간 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눈에 담긴 빨간 머리의 강백호는 빠르게 다가오며 점점 더 커졌고, 빨간 머리를 담은 심장도 점차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 빨간 머리가 보이지 않게 됐을 때, 뜨거운 품이 나를 끌어안았다.

 

“뭐야아! 어떻게 왔어? 말하고 오지!”

 

우리는 거실로 들어와 한참이나 지난 이야기를 떠들었다. 회사는 어떻게 하고 왔는지,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와 같은 것들이 백호에겐 중요했던 모양이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고, 긴 휴식이 필요했고, 서프라이즈 해주고 싶었다는 말들로 적당히 답하며 백호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백호는 별 의심없이 제 스케줄을 줄줄 읊었다. 오늘은 연습이 없고, 내일부터 이틀간 연습이야. 그리고 이틀간 원정경기를 다녀오면 삼일 휴식이고.

 

“내일 나 연습 끝나고 맛있는 레스토랑 가자. 아니면 원정경기 보러 갈래? 내가 비행기 끊어줄게.”

 

나는 니가 열심히 돈 버는 동안, 이 넓은 집에서 혼자 휴식하겠노라고 웃으며 받아쳤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계획을 세웠다. 백호가 원정경기 다녀오는 동안 주변 꽃집을 검색하고 캐리어 깊숙이 숨겨둔 반지를 확인하고. 백호가 원정경기에서 돌아온 날 저녁에는 꼭 말해야지. 분명,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백호의 얼굴을 보자마자 결혼하자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입술 떼기가 어려울 줄이야.

 

다음날부터 나는 백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동네를 탐색했다. 발급해놓은 국제운전면허증과 백호가 건네준 차키는 시너지를 발휘했다. 가까운 한인마트에서 장을 보고, 분위기 좋은 카페와 예쁜 꽃이 있는 꽃집까지 알아두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백호는 원정경기 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 전, 다시 한번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 언젠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 전 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때처럼 말했다.

 

“호열이 너랑 있으면, 진짜 집에 온 것 같아.”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그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백호가 원정경기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저녁상을 차렸다. 예전처럼 밥과 국을 차리고 반찬 세 가지를 해냈다. 고등학생 때보다는 나아진 실력이었지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백호는 미처 짐을 다 풀지도 않고 다가와 나를 껴안았다. 가벼운 포옹 인사가 끝난 후, 식탁 위를 본 백호는 휘둥그레한 눈으로 상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얼굴로 환하게 웃으면서.

 

“호열아! 이게 다 뭐야?”

“얼른 먹자, 국 식겠다.”

 

식탁 의자에 앉아 앞치마를 벗으며 그리 말했다. 백호는 숟가락을 들고 국을 한 숟가락 먹더니 크으, 하는 소리를 냈다. 허겁지겁 맛있게 음식을 먹는 백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물을 한 컵 떠서 건넸다. 뭐라고, 말을 하지. 이 정도면 나랑 결혼해줄래? 나 정도면 너랑 결혼할 수 있지 않나? 나랑 결혼할래? 하지만 나는 결국 백호가 밥 세 그릇을 비울 때까지 입을 떼지 못했다.

 

“백호야 맛있게 먹었어?”

“응, 당연하지! 호열아 진짜 맛있다. 너 어떻게 요리 실력이 더 늘었냐.”

 

백호는 제가 하겠다며 나를 식탁에 앉혀 놓은 채 설거지를 했다. 커다란 등짝을 보면서도 나는 계속 이게 맞는 길인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곁에서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에는 달리 다른 해결책이 없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설거지를 마친 백호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백호가 내려준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는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 않았고, 백호가 얘기하는 말도 외국어처럼 들렸다. 내 신경은 온통 오른쪽 주머니에 쏠려있었다. 클래식한 반지 케이스 안에는 고르고 고른 커플링이 모셔져 있을 거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고백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일 거다. 백호에게 청혼하고 싶다. 백호와 결혼하고 싶다. 내 옆에서 예쁘게 반짝반짝 빛나줬으면 좋겠다. 영원히.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망설임 없이 오른쪽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어 백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게…… 뭐야?”

 

신나게 떠들던 백호의 입술이 맞물렸다. 긴 침음이 들렸다. 나는 반지 케이스를 활짝 열며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백호야.

처음에는 그냥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니곁에서 항상 평생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어. 내 모든 하루가, 일상이, 삶이, 온통 너로 가득해. 아무리 생각해도 청혼하지 않을 이유를 못 찾았어.

내가 가진 건 좀 없지만, 돈도 너보다 못 벌고 집안일도 너보다 특출나게 잘하지는 못하지만, 삼시세끼 밥은 차려줄게. 그 누구보다 널 사랑할게.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이 사랑할게.

나랑 결혼해줄래?”

 

백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잘생긴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는 커다란 손을 덜덜 떨었다. 나는 웃으며 흔해 빠진 반지 케이스에서 큰 사이즈의 반지를 꺼냈다. 그리고 여전히 덜덜 떨고 있는 백호의 손을 꼭 잡고 굵직한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 반지는 맞춘 듯이 꼭 맞았다. 반지를 낀 백호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이내 팔뚝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여전히 덜덜 떨고 있는 손으로 남은 반지를 꺼내 든 백호가 화답하듯 내 손을 움켜쥐었다. 그 작은 반지는 나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졌다.

비로소 우리는,

 

“크, 크흥 양호열 너어! 내가 먼저 프로포즈하려고 했단 말이다!”

“하하, 그러면 내가 한 청혼은 취소할까?”

“그러면 안 되지! 넌 이제 내 꺼야!”

※백호의 소속팀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를 연고지로 하는 ‘Golden State Warriors’입니다.

실제 NBA 농구 스타 스테픈 커리 선수가 뛰고 있는 팀입니다.

백호가 팀을 선택한 기준 중에 유니폼이 어딘가 호열이를 닮아서 같은 이유가 있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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